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방위군 사건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[youtube(jG2JUYLkCyw)] >인간을, 포로도 아닌 동포를,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. 6·25전쟁의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. [[이승만]] 정권과 그 지배적 인간들, 그 체제 그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.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, 형제와 오빠가, 아들이 죽어갔는지... [[단테]]의 [[연옥]]과 [[불교]]의 [[지옥]]도 그럴 수 없었다.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'''한국의 1951년 겨울의 참상'''을 보았더라면 '''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.''' >---- >[[리영희]]의 증언[* 출처: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 편 1: 6·25 전쟁에서 4·19 전야까지.] 국민방위군 사건은 [[1950년]]과 [[1951년]]에, 즉 [[6.25 전쟁]] 중 [[대한민국 제1공화국]] 정부가 강제징집한 국민방위군 수만 명이 국회, 정부 및 군 고위층의 예산 [[횡령]] 및 [[뇌물]] 범죄 탓에 [[보급]]을 받지 못하여 그대로 희생된 [[대한민국]] 건국 이래 최대 최악의 군수비리 사건이자 [[국가폭력]]이다. 병력수송 비용과 식비 등을 횡령하여 신정동지회 [[김종회(1923)|김종회]] 등 국회의원 20여 명에게 공작비와 여비 등 명목으로 제공했다. 그 탓에 징집된 방위군이 혹한기 속에 굶주리면서 행군하여 기아와 동상으로 사망하였다. 적군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와 인명경시로 100여 일 사이에 전투에 참여는커녕 [[총]] 한 번 못 만져 본 장병 최소 7만 7천[* 1951년 2월 총무처(현 행정안전부) 생산문서] ~ 12만 명[* 1951년 국회 제2국민병비상대책위원회 생산자료를 토대로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추정]이 후방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었으며 전체의 80% 가량이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. 수족손실의 중상자도 보수적인 학계에서 조차 최소 20만 명 이상으로 본다.[* 참고로 6.25 전쟁의 국군 전사자가 13만 7899명이다.] [[이승만]] 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학자 [[유영익]][* 이 사람은 이승만을 가리켜 [[세종대왕]]과 맞먹는 인물이라고 찬양할 만큼 열렬한 이승만빠다. [[http://media.daum.net/v/20131016082011071|링크]] 그 이승만빠조차도 저 사건만은 절대로 옹호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막장이었다는 것이다.] 교수도 장정 9만 명가량이 동사, 아사, 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규정했다. 이 사건으로 '''[[신성모]]''' [[대한민국 국방부장관|국방부 장관]][* [[거창 양민 학살사건|거창 양민 학살]]도 지시한 정황이 있고 전쟁 전 예비군 해체도 지시한 사람이며 [[한강 인도교 폭파|한강철교 폭파]]까지 지시하고 도망치는 짓을 저지르고도 장관만 그만두었을 뿐, 6.25 이후에도 10년 가까이 좋은 자리를 해 쳐먹다가 [[4.19 혁명]]이 나자 그제서야 뇌출혈에 걸려 한 달 만에 죽었다.]이 물러났다. 그리고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던 [[대한민국 부통령|부통령]] [[이시영(정치인)|이시영]](李始榮)은 이승만 정부에 거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사표를 제출하여 스스로 행정부 부통령직에서 물러났을 지경이었다. 6.25 초기 [[북한]]이 남한 지역을 점령한 후 동원한 인력은 무려 60만 명이었다. 이들 중 상당수는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최전선의 [[총알받이]]로 투입되었다. 나머지는 탄약 및 식량 운반, 교량과 도로 보수 등에 동원되다가 전방에 병력 손실이 발생하면 병력보충용으로 투입되었다.[* 지급할 수 있는 장비에 한계가 있으니, 60만 명 전부를 한 번에 투입하지는 못했다.] 전쟁 시작 당시 북한군은 약 20만 명이었지만 최초 3개월간 사상자만 22만 1천 명이었다. 이 엄청난 사상자를 남한에서 동원한 의용군으로 보충했다. 그래서 북한으로 후퇴할 무렵 북한군은 약 5만 명, 의용군 5만 명이었다. 후퇴하지 못하고 낙오되어 빨치산이 된 2만 5천 명은 제외한다. 애시당초 인구가 부족했던 북한은 저 20만 명이 짜내고 짜낸 병력이었고 한 번 잃은 뒤로는 전쟁 내내 재기하지 못했다. 한국군이 남아도는 실업자와 쏟아지는 미군 물자를 합성해 사단을 찍어내며 갈수록 강화된 것과 달리 북한군은 휴전까지 주력 교전단체가 된 적이 없다. [[1.4 후퇴]] 당시 또 다시 남한의 청장년을 북한 점령 지역에 놔두고 갈 수 없는 정부 입장에서 청장년 국민 총동원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. 국민방위군 모집은 공무원들이 소집 영장을 작성하여 강제적으로 실시했지만[* 손이 아파서 하루에 200장 정도만 만들었다.] 당시 서울/경기 일대 청장년들은 공포심을 느껴 영장을 받지 않아도 엄청난 숫자가 소집장소로 몰려들었다. 남아 있으면 북한의 의용군에 끌려갈 가능성이 매우 높고 소집되면 안전하게 대피시켜 주고 최소한 밥은 주는 줄 알던 상황이라 서울/경기 일대 청장년들이 몰려듦은 당연했다.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군인 모병 업무를 맡은 청년방위대는 [[프레스 갱|길거리에서 젊은이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는 이른바 '홀치기'를 하는 등]] 온갖 행패와 비리를 저질러 심각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.[* 출처: 부산일보사, 『비화 임시수도 천일』(상), 1983, 160쪽] 결과만 보면 북한 점령 지역의 남한 청장년을 소개한다는 목적 자체는 성공하였다. 그러나 또 다른 목적인 국군의 징병자원 확보는 대실패했다. 소개 과정에서 상당수가 사망했거니와 생존자도 온갖 고생으로 체력이 소진되어 말 그대로 기진맥진한 뒤라 도저히 군인으로 쓸 수 없어 대부분 인원을 귀향조치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